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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한인희의 중국 역사의 뒤뜰] 중국인과 육식③ : 돼지고기를 즐긴 특별한 중국인들
작성자 관리자 등록일 2016.07.04 조회수 1479


[한인희의 중국 역사의 뒤뜰] 중국인과 육식③ : 돼지고기를 즐긴 특별한 중국인들



사람마다 식습관은 다양하다. 어릴 때 고향에서 어머님이 해주시던 손맛을 평생 잊을 수 없는가 하면 어떤 이는 종교적인 신념으로 특정 음식을 금기시하는 경우도 있다.


이슬람교도는 돼지고기를 금기시한다. 그 이유는 이슬람의 경전 <쿠란>에 "돼지고기와 죽은 고기의 피를 먹지 말라"는 구절이 있기 때문이다. 미국의 영화배우 니콜라스 케이지도 돼지고기를 먹지 않는다고 알려져 있다. 돼지고기가 너무 속물스럽고 생선과 닭고기가 귀한 것이라고 믿고 있기 때문이란다.


그러나 중국인들에게 고기 육(肉)은 일반적으로 돼지고기를 의미한다. 그만큼 중국인들은 돼지고기를 좋아한다. 그런 중국인들 중에서도 특별히 더 돼지고기를 즐겨먹은 유명인사는 누가 있을까?


당나라 때 '약의 왕(藥王)'이라 칭송받던 손사막(孙思邈, 581~682년)이 돼지고기를 즐겨 먹었다. 그는 특히 돼지 대장으로 만든 '호로두(葫蘆頭)'라고 하는 음식을 추천했다. 이 음식은 섬서 성 서안의 한족들이 즐겨먹던 음식이다. 호로두는 북송 시절에 길거리 음식인 '전백장(煎白腸)'으로 일반 백성들에게도 널리 사랑을 받게 되었다.


돼지의 대창은 기름이 많지만 모양이 마치 호로병처럼 생겼기 때문에 생긴 이름이다. 호로두의 기본 재료는 돼지의 대장과 돼지 뱃살이다. 돼지 대장과 닭고기, 해삼, 오징어 등을 짤게 썰고 뼈를 서너 번 고아서 돼지기름과 채소를 넣고 끓이면 된다. 먹을 때는 마늘과 고추장을 곁들어 먹으면 느끼하지 않다.


손사막은 이 요리의 레시피를 장안의 어느 식당 주인에게 알려주고 약을 넣은 호로병을 주면서 맛을 조절하도록 했다. 식당 주인은 손사막이 알려준 레시피에 따라 장안에서 '호로두'라는 이름으로 이 음식을 팔게 되었다. 따라서 이 음식은 1000년의 역사를 갖고 있는 셈이다.


호로두는 1930년대에 육류의 발전과 함께 첨가하는 해산물 종류도 다양해지면서 다양한 변화를 보였다. 예를 들어 탕에 뼈와 닭고기 등을 첨가했기 때문에 국물 맛이 더욱 진해졌다. 특히 가을과 겨울의 제철 음식으로 이름을 떨쳤다.


중국 북쪽의 금나라 황실에서는 특별히 동북 지방 돼지고기를 즐겨 먹었다. <금사지리지(金史地理志)>의 기록에 따르면 회녕부(會寧部, 지금의 하얼빈 아성 지역) 일대의 돼지고기의 맛이 최고라고 기록하고 있다. 금나라는 주변 지역으로부터 매년 '돼지 2만 두'를 조공 받기도 했다. 금나라 해능왕(海陵王)은 북경으로 천도한 뒤에도 오로지 동북 돼지만을 즐겼다고 한다.



'동파육'을 탄생시킨 소동파의 돼지고기 사랑


중국에서 돼지고기를 가장 좋아한 유명인사로 소동파(蘇東坡)를 빼놓을 수 없다. 그의 본명은 소식(蘇軾)이고, 호는 '동파거사(東坡居士)'였다. 소식이 유배를 갔던 호북성 황주(黃州) 땅은 "돼지, 소, 노루, 사슴 고기가 많았고 생선과 게가 매우 저렴했다." 이런 이유로 소식은 매일 고기를 즐겼다. 그가 특별히 돼지고기를 노래한 <저육송(猪肉颂)>에서는 "날마다 돼지고기 한 사발씩 퍼 먹고, 배가 불러 기분을 내더라도 그대는 신경 쓰지 말게(每日起來打一碗 飽得自家君莫管)"라고 노래할 정도로 돼지고기를 좋아했다.


소식의 돼지고기 사랑은 그 유명한 동파육(東坡肉)을 탄생시켰다. 삼겹살에 갖은 양념을 하고 "불을 줄이고 물을 적게 넣고 졸이면 스스로 특별한 맛이 났다." 이것이 동파육의 조리 비법이었다. 북송 원우(元祐) 4년(1089년), 소식은 항주의 관리로 부임한 뒤 백성들을 조직하여 서호를 준설하게 되었다. 공사가 끝난 후 자신이 직접 돼지고기 요리를 해서 이들을 위로했다. 이렇게 탄생된 '동파육'은 이후 중국의 대표적인 돼지고기 요리가 되었다.


송대에 돼지고기가 보편화되면서 유명한 돼지고기 요리들이 속속 등장했다. 대표적인 것이 '찐 돼지 머리고기'였다. 돼지 머리고기는 미식가들의 눈에는 '살아있는 고기'였다. 많은 이들이 이 요리를 좋아했다. 북송의 혜홍(惠洪)의 <냉재야화(冷齋夜話)> 중의 '승부증돈시(僧賦蒸豚詩)'에는 찐 돼지 머리고기가 '맛이 특별히 좋다'고 기록되어 있다.


특히 이 책에서는 맛있는 돼지고기를 고르는 비법을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는데 "입이 길고 털이 짧으며 비계가 얇고 오래 동안 산에 방목하여 약초를 먹은 놈이 좋다"고 했다. 이것은 입이 길고 털이 짧고 마른 형의 돼지 머리를 가진 종자를 말하며 산에 방목을 해서 녹색 식물들을 먹고 자라면 육질이 특별히 맛있다는 뜻이다. 요리를 만드는 방법에 대해서는 "돼지고기를 솥에 넣고 찔 때 파초 잎에 싸서 쪄낸 뒤 살구 쨈을 뿌려 먹으라"고 했다.


명대에는 황실의 식단에 돼지고기가 등장하기 시작한다. <명궁사(明宮史)>의 기록에 따르면 황실에서는 설날의 식단에 소저육(燒猪肉), 저관장(猪灌腸), 저비육(猪臂肉), 돼지고기 만두 등이 있었다. 이것은 이미 돼지고기가 품격 있는 식탁에도 오르고 있음을 알려 준다. 그러나 민간에서는 돼지고기의 유행 정도는 여전히 소고기나 양고기 수준은 미치지 못했다.


명나라 만력 연간 북경의 물가를 보면 만력 5년(1577년)에 소고기 한 근은 0.013은량, 돼지고기는 0.018은량이다. 그러나 만력 20년(1592년)에는 돼지고기 값이 0.02량으로 폭등했고, 소고기와 양고기는 한 근에 0.015량이 필요했다. 이는 이 시기 소고기와 양고기가 돼지고기보다 더 싸고 보편적이었음을 말해 준다.



황제의 연회에 돼지고기 요리를 올리기 시작한 청조


돼지고기와 관련하여 청조의 개국 황제 누루하치의 '황금육(黃金肉)' 이야기가 있다. 누루하치는 젊은 시절 요녕성 무순(撫順)에서 명나라 관리로 지역 군사 책임자였던 총병(總兵)의 관저에서 허드렛일을 하고 있었다. 어느 날 총병 관저의 주방장이 병이 났다. 음식을 할 수 없게 되자 식모들이 음식을 대신하게 되었고 마침내 7가지 음식을 만들게 되었다.


문제는 음식의 숫자가 홀수였다. 중국인들은 홀수를 좋지 않게 생각한다. 이런 이유로 누루하치는 급하게 8번째 음식을 만들게 되었다. 돼지 등심에 달걀노른자를 입혀 튀겨내었다. 그런 뒤 누루하치는 양념을 해서 접시에 담아냈다. 요리의 컬러가 황금색이었다. 이렇게 하여 '황금육'이 탄생하게 되었다.


이후 명조가 망하고 청조가 중원에 주인이 된 이후 청조의 역대 황제들은 모든 연회에서 가장 먼저 오르는 요리를 '황금육'으로 정했다. 조상의 은덕을 잊지 않겠다는 의미였다. 서태후는 "이 음식은 조상이 하사하신 것이니 우리들은 절대로 조상을 잊어서는 안 된다. 반드시 대대로 이어져 내려가야 한다!"고 당부하기도 했다.


청대의 돼지고기는 민간의 식탁에도 오르게 되고 더욱 유행하였다. 먹는 방법도 다양화되었으며 오늘날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청나라 황실은 돼지고기를 특별히 즐겨먹었다. 황실 내에서 육식 가운데 돼지고기의 소비가 가장 많았다. 청궁 당안 <위진사문(爲奏事聞)>에 따르면 건륭 47년(1782년) 정월 어선방에서는 돼지고기를 얼마나 많이 잡았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초하루에서 열흘까지 50근짜리 돼지 55두를 잡아 돼지고기가 3936근8량이었고, 11일부터 20일까지 50근짜리 돼지 74두를 잡아 돼지고기가 6533근16량이었으며, 21부터 30일까지 50근짜리 82두를 잡아 돼지고기의 양이 7719근 6량이었다.


이 기록은 복륭안(福隆安, 1746~1784년) 등 어선방 관리들이 세 차례에 걸쳐 올린 상소문에 따른 것이다. 이렇게 볼 때 당시 궁궐에서 한 달 동안 소비된 돼지는 210두로 소비된 고기만 1만8000근에 달하였다. 이것은 돈육에 한정된 것이며 돼지 부속품인 족발, 내장, 폐, 돼지기름 등은 별도였다. 물론 현재 광동의 대표 요리 가운데 하나로 새끼 돼지 바비큐인 '고유저(烤乳猪)'를 만들기 위해 새끼 돼지도 다양하게 사용되어졌다.


청대의 미식가 원목(袁牧, 1716~1797년)도 돼지고기 요리를 즐긴 인사다. 그의 <수원식단(隨園食單)>에서 이미 돼지고기는 단독으로 <특성단(特牲單)>에 배치했다. 그의 소개 중에 돼지고기와 관련된 43가지의 요리가 있었는데 그 가운데 홍외육(紅煨肉), 백외육(白煨肉), 유작육(油灼肉) 등이 있었다.


특히 그가 즐긴 요리 가운데 유명한 것으로 '유폭쌍취(油爆雙脆)'라는 돼지고기 요리가 있다. 이 요리는 원래 유명한 산동 요리였다. 요리 방법은 돼지 뱃살과 닭똥집을 얇게 썬 다음 프라이팬을 뜨겁게 달군 뒤 기름에 볶아낸다. 그렇게 되면 바싹하고 말랑하다. 원목은 이 요리를 극찬했다. 특히 그는 이 요리를 여러 차례 맛보고 난 뒤 이 요리가 혹시 사라질 것을 걱정하여 자신의 음식 관련 명저인 <수원식단>에 만드는 방법까지 자세하게 기록했다.


현대에 들어와서 돼지고기를 즐긴 명사로 경극의 대가 매란방(梅蘭芳)이 있다. 그가 즐긴 돼지고기 요리는 호남요리 계열의 '탕포두두(湯泡肚頭)'다. 1937년 중국과 일본이 전쟁을 하는 동안 북경에는 '마개찬관(馬凱餐館)'이 문을 열었다. 주인은 음식점의 홍보를 위해 매란방을 초대하여 음식을 대접했다.


돼지 뱃살, 밤버섯, 완두 싹, 온갖 고기의 뼈들을 넣어 탕을 만들었다. 요리 이름은 '밤버섯 탕포두'였다. 매란방과 그의 비서 허희전(許姬傳)이 요리를 맛본 뒤 흥분했다. 그러자 주인은 매란방에게 시를 한 수 지어달라고 부탁했고, 이렇게 하여 요리 이름을 '탕포두두(湯泡肚頭)'로 바뀌게 되었다. 지금도 유명한 요리다.


사천 출신 유명 화가로 장대천(張大千, 1899~1983년)도 돼지고기를 즐긴 유명인사다. 그가 좋아했던 돼지고기 요리는 '항아리고기(壇子肉)'이었다. 사천의 명품 요리였다. 이 음식은 돼지고기였지만 느끼하지 않고 시골 맛이 물씬 나는 요리다. 사천 지역은 양곡도 많이 나고 돼지도 많다.


그러나 가을 수확 시기에 농민들은 너무도 바쁘다. 농민들이 고기를 맛보기 위해 솥 대신에 항아리에 돼지고기를 넣고 소금과 물, 그리고 파와 생강을 첨가하여 밀봉한 뒤 타고남은 잿불에 올려놓고 은근하고 천천히 익도록 내버려둔다. 농민들이 농사를 마치고 집에 돌아오면 이미 고기가 다 익게 되는데 이 고기 맛이 기가 막히다. 이러한 방식으로 중국 각지에서 다양한 항아리 고기 요리가 있다.


▲ 모택동이 즐겨먹었다는 호남(湖南) 지역 특징의 '모씨홍소육'(毛氏紅燒肉). ⓒwikimedia.org


모택동(마오쩌둥)도 돼지고기 애호가로 알려져 있다. 그는 돼지비계 덩어리로 만든 홍소육(紅燒肉)을 평생 즐겼다. 그리하여 북경의 식당에서는 '모씨홍소육(毛氏紅燒肉)'이라는 메뉴를 내놓기도 했다. 유명인사가 즐긴 요리는 원 뜻을 저버리고 상업화되는 경향이 비일비재하다. 그러나 역사 속에서 이들의 즐긴 음식은 화려함보다는 소박함에서 시작되었다. 산해진미가 아니더라도 어렵고 힘든 시기를 이겨냈던 음식이 더욱 의미가 있는 것이다.


음식이란 단순하게 먹는 행동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문화이자 삶 자체이다. 1994년 리안 감독이 만든 영화 〈음식남녀〉는 한 문화권 속에서 전통과 근대가 충돌하는 과정을 보여줬다. 또한 2012년 방영된 진효경(陳曉卿)의 유명한 다큐멘터리 <혀끝 위의 중국>은 "혀끝에 닿으면 바로 마음이 울리는 먹거리"로 음식에 대한 진정한 의미에 대해 음미하게 만들었다.


먹는다는 것은 그 자체가 삶이고, 무엇을 먹느냐는 것은 그 자체로 문화인 것이다.










출처 : 프레시안 (2016.07.04) http://www.pressian.com/news/article.html?no=138552&ref=nav_sear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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